유럽의 여러 국가는 주거를 생존의 수단이 아닌 인간다운 삶을 위한 기본 권리로 인식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광범위한 공공지원과 임차인 보호제도를 정비해 왔습니다.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스웨덴 등 각국은 자국의 역사적, 사회적 환경에 맞춘 주거복지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으며, 장기 임대, 임대료 규제, 사회주택 확대 등을 통해 실질적인 주거 안정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본 글에서는 유럽 국가들의 대표적인 주거복지 정책을 비교하고, 한국 주택정책에 주는 교훈을 정리합니다.
주거는 ‘복지’인가, ‘상품’인가: 유럽의 시각
유럽의 많은 국가는 주거를 단순히 개인의 선택에 의존하는 사적 재화로 보지 않고, 인간다운 삶을 위한 사회적 권리로 규정합니다. 이는 사회복지국가 모델의 철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주거권 보장에 있어 정부의 개입이 필수적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작용합니다. 이에 따라 공공주택 제공, 임대료 규제, 세입자 권리 보장 등의 정책이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특히 유럽은 주택 가격의 급등과 소득 불균형으로 인한 주거 불안정 문제를 구조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정책을 설계해 왔습니다. 단기적 대책이 아닌, 주거복지 체계 자체를 공공의 책임으로 삼는 접근 방식은 민간 중심으로 설계된 한국의 시스템과는 구조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한 유럽의 주거복지 철학은 단순히 저소득층 보호에 국한되지 않고, 중산층과 청년층, 고령층을 아우르는 보편적 제도로 진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점이 큽니다.
유럽 주요 국가별 주거복지 정책 사례
첫째, **독일**은 임대주택 중심 국가로서 전체 가구의 약 55%가 민간 또는 공공임대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독일은 임대료 상승 억제를 위한 '임대료 상한제(Rent Brake)'를 시행하고 있으며, 계약 해지를 어렵게 하는 법적 장치를 통해 세입자 보호를 제도화했습니다. 임대주택에 거주하는 것이 결코 불안정한 상태가 아니며, 장기 거주가 보장된다는 신뢰가 사회 전반에 형성되어 있습니다. 둘째, 네덜란드는 ‘사회주택(social housing)’의 비율이 매우 높은 국가로, 전체 주택의 약 30% 이상이 사회주택으로 분류됩니다. 이들 주택은 비영리 주택협회(Housing Association)에 의해 관리되며, 저소득층뿐 아니라 중산층까지도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정부는 임대료 상한선 설정, 임대료 인상률 규제, 소득별 임대 자격 기준을 통해 시장 안정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셋째, 프랑스는 ‘보편적 주거 지원’이라는 원칙 하에 저소득층 뿐만 아니라 모든 계층을 위한 주거 보조금 제도를 운영합니다. APL(Aide Personnalisée au Logement)이라는 주거 수당은 소득, 주택 규모, 지역 등에 따라 차등 지급되며, 청년 및 학생의 독립적 거주 지원에도 중점을 둡니다. 또한, 프랑스는 공공임대 외에도 중간소득층을 위한 임대 상품(LIHT)을 적극 도입하고 있습니다. 넷째, 스웨덴은 모든 국민이 주거에 있어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철학 아래 ‘보편주의 주거복지’를 실현하고 있습니다. 스웨덴의 공공주택은 시장임대와 유사한 수준에서 공급되며, 자산·소득 제한이 없고, 신청자에게는 동등한 기회가 부여됩니다. 이는 선별적 복지가 아닌, 포괄적 복지를 기반으로 하는 주거정책의 전형적인 모델입니다. 이러한 국가들은 단순한 주택 공급 정책이 아닌, 세입자 권리 강화, 장기 거주 보장, 임대료 통제, 사회적 통합 등을 포괄하는 구조를 통해 실질적인 주거 안정성과 사회적 신뢰를 형성해오고 있습니다.
유럽 모델이 한국 주거정책에 주는 시사점
유럽의 주거복지 정책은 그 철학과 운영 방식에 있어 한국의 부동산 중심 정책과는 명확한 차이를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주거 불안정이 중산층과 청년, 고령층 등 광범위한 계층으로 확대되는 한국의 현실을 고려할 때, 유럽 모델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매우 큽니다. 첫째, 공공임대주택의 비중 확대와 품질 개선이 필요합니다. 현재 한국의 공공임대 비율은 8% 내외로 OECD 평균에 비해 낮은 수준이며, 공급 속도나 주거 환경 측면에서도 개선 여지가 큽니다. 단순한 ‘수량 중심’ 공급을 넘어, ‘삶의 질 중심’의 공공임대 설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둘째, 임대차 보호 법제의 강화가 요구됩니다. 현재 임대차 3 법은 일시적인 효과만을 가져왔고, 계약갱신청구권, 전월세 상한제 등 제도는 실효성과 적용 가능성 면에서 보완이 필요합니다. 독일과 같이 법제도화된 세입자 보호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신뢰를 구축하는 데 유리합니다. 셋째, 보편적 주거 지원 제도의 도입이 검토될 수 있습니다. 현재 한국의 주거급여는 제한적 계층에게만 적용되고 있으나, 유럽식 주거 수당처럼 소득과 주거 수준을 기준으로 차등 지급하는 보편적 제도가 도입된다면, 보다 폭넓은 계층의 주거 안정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넷째, 비영리 주택협회의 활성화가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네덜란드나 독일처럼 시장과 공공 사이의 중간 영역에서 작동하는 비영리 단체 기반의 주택 운영은 한국의 민간 중심 구조에 균형을 더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안입니다. 결론적으로 유럽의 주거복지 모델은 정책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나침반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단기 성과 중심이 아닌, 주거를 ‘권리’로 보는 사회적 인식과 법적 체계의 정비, 그리고 안정적이고 품위 있는 삶을 위한 제도적 기반이 한국에서도 구축될 수 있도록, 중장기적 관점에서의 주거복지 개혁이 절실한 시점입니다.